고3 때 축구 시작해 치열한 노력으로 국가대표까지 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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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한(백넘버는 대표팀 신인 시절 20번, 나중에는 16번)과 차범근(대표팀 신인 시절 9번, 나중에는 11번)은 한국 대표팀의 양대 기둥이었다. '찼다 찼다 차범근/ 센터링 올렸다/ 떴다 떴다 김재한/ 헤딩 슛 골인' 이런 개사곡을 기억하는 올드팬들도 많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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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로는 국내외에서 김재한에게 시비거는 선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세연은 언젠가 필자와 만났을 때 이 사건을 두고 "키 크고 그렇게 독한 선수는 처음 봤다"고 했다. 최전방에서 격한 몸싸움을 마다하지 않는 검투사같은 플레이 스타일 탓에 선수 시절 코뼈만 세 차례 부러지는 등 사연이 많았다.
A매치 통산 기록은 58경기 출전, 33득점. 경기당 득점 0.57골을 넘어선 플레이어는 아직 없다. 팬들이 기억하는 가장 인상적인 득점은 1973년 11월 10일 서울운동장(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호주와의 경기 선제골이다.
월드컵에는 단 16개국만 출전하고, 아시아·오세아니아엔 단 한 장의 출전권만 걸려있던 시절. 한국은 이스라엘을 물리치고 최종 예선에 진출, 호주와 단두대 매치를 치렀다. 10월 28일 시드니 어웨이 경기는 0-0. 서울에서 열린 홈 경기 전반 14분. 호주의 크로스를 한국 골키퍼가 펀칭 미스, 주장 피터 윌슨이 그대로 로빙슛을 쐈다. 텅 빈 골문으로 날아가던 공을 걷어낸 선수는 백넘버 3번의 김호곤. 1분 후 이번에는 호주의 결정적 실수가 나왔다. 김재한은 상대 수비의 백패스를 가로챘다. 허겁지겁 달려나오는 골키퍼를 바라보며 여유있는 동작으로 빈틈을 노려 오른발 슛을 터뜨렸다. 대한민국의 선취골을 넣었다.
한국은 고재욱의 골로 2-0으로 달아나며 월드컵 출전권을 거의 손에 넣었지만, 호주의 반격에 두 골을 허용, 2-2로 비겼다. 어웨이 골 룰이 없던 시절이라 1주일 뒤 제3국 홍콩에서 플레이오프가 열렸고, 호주가 1-0으로 승리하며월드컵에 나갔다. 이때의 활약을 눈여겨 본 홍콩 세이코 SA가 입단 제의를 했고, 김재한은 홍콩 세미프로팀으로 이적해 두 해 동안 뛰었다.
1978년 월드컵 예선은 김재한의 전성기였다. 국가대표 경기 이틀 전에야 차출이 가능하다는 말에 미련없이 세이코와 계약을 해지하고 국내로 복귀했다. 한국은 1차 예선에서 절대 장자 이스라엘을 차범근, 박상인, 최종덕의 연속골로 3-1로 잡았다. 최종예선은 한국, 이란, 호주, 쿠웨이트, 홍콩 다섯팀의 홈앤드에웨이 풀리그. 77년 6월부터 장장 6개월 동안 이어진 대장정에서 대한민국은 다시 한번 2위로 예선탈락하며 분루를 삼켰다. 승자는 6승2무의 이란. 한국의 성적은 3승4무1패였다. 한국의 1패는 최종예선을 4위로 마감한 호주와의 어웨이 경기 1-2 역전패다. 이란의 2무는 한국과의 0-0, 2-2 무승부다. 12월 홍콩과의 홈경기 5-2 승리가 김재한의 대표팀 은퇴 경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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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재한은
경북 금릉군(현 김천시) 출생으로, 제일모직(1966), 건국대(1967~1970), 제일모직(1971), 주택은행(1972~1975), 홍콩 세이코 SA(1976~1977), 주택은행(1977~1979)에서 선수로 활약했다. 국가대표로는 1972년부터 1978년까지 58경기에 출전해 33골을 넣었다. 1972년 7월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메르데카배가 국가대표 데뷔전이다. 은퇴 후에는 주택은행 감독(1980~1989)을 거쳐 주택은행 지점장·영업부장, 싸카스포츠 부사장·사장,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