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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재기자의 스포츠人] ‘아시아 원조 고공 폭격기’ 김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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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재 선임 기자

승인 : 2024. 12. 23. 14:20

190cm 공격수...점프력까지 좋아
고3 때 축구 시작해 치열한 노력으로 국가대표까지 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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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한 축구원로(왼쪽)와 장원재 선임기자/ 사진제공=전형찬
경기장에서 장신의 노신사를 만났다. 1970년대 아시아 최장신 스트라이커 고공 폭격기 김재한(77)이다. 국가대표 농구팀 센터의 신장이 186cm에 불과하던 시절, 190cm의 축구 공격수는 그야말로 비교 불가한 피지컬의 소유자였다. 게다가 점프력도 좋았다. 다른 종목을 하다 고3 때 축구를 시작했지만 치열한 노력으로 국가대표까지 승선한, 한국 축구 3대 전설의 보유자다. 또 다른 전설은 조광래와 김평석이다. 조광래는 고2 때 운동장에서 축구하는 것을 우연히 본 축구부 감독의 간청으로 진주고 우등생에서 축구선수로 전향했다. 1998 월드컵 벨기에 전 임시 사령탑을 맡기도 했던 김평석은 축구부가 없던 여의도고 출신이다. 한국 조기축구가 배출한 아직까지는 유일한 대표선수다.

김재한(백넘버는 대표팀 신인 시절 20번, 나중에는 16번)과 차범근(대표팀 신인 시절 9번, 나중에는 11번)은 한국 대표팀의 양대 기둥이었다. '찼다 찼다 차범근/ 센터링 올렸다/ 떴다 떴다 김재한/ 헤딩 슛 골인' 이런 개사곡을 기억하는 올드팬들도 많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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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시절의 김재한./사진제공=이재형 축구수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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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의 국가대표팀. 아랫줄 오른쪽에서 세번째가 김재한. 뒷줄 오른쪽에서 두번째 이회택, 다섯번째 차범근, 아홉번째 이세연, 열번째 김진국 등의 보인다./사진제공=이재형 축구수집가
'키 큰 사람은 싱겁다'는 속설이 있지만 김재한은 예외였다. 대표팀 자체 청백전, 골키퍼 이세연이 펀칭하는 동작에 이어 김재한의 얼굴을 자연스럽게 강타했다. 치아가 뽑힐 정도의 강타(强打)였다. 피투성이의 김재한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툭툭 털고 일어나 빠진 치아를 주머니에 넣었다. 당시 경기복에는 바지 안쪽에 주머니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골키퍼를 한번 노려본 뒤 플레이를 계속했다.

이후로는 국내외에서 김재한에게 시비거는 선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세연은 언젠가 필자와 만났을 때 이 사건을 두고 "키 크고 그렇게 독한 선수는 처음 봤다"고 했다. 최전방에서 격한 몸싸움을 마다하지 않는 검투사같은 플레이 스타일 탓에 선수 시절 코뼈만 세 차례 부러지는 등 사연이 많았다.
A매치 통산 기록은 58경기 출전, 33득점. 경기당 득점 0.57골을 넘어선 플레이어는 아직 없다. 팬들이 기억하는 가장 인상적인 득점은 1973년 11월 10일 서울운동장(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호주와의 경기 선제골이다.

월드컵에는 단 16개국만 출전하고, 아시아·오세아니아엔 단 한 장의 출전권만 걸려있던 시절. 한국은 이스라엘을 물리치고 최종 예선에 진출, 호주와 단두대 매치를 치렀다. 10월 28일 시드니 어웨이 경기는 0-0. 서울에서 열린 홈 경기 전반 14분. 호주의 크로스를 한국 골키퍼가 펀칭 미스, 주장 피터 윌슨이 그대로 로빙슛을 쐈다. 텅 빈 골문으로 날아가던 공을 걷어낸 선수는 백넘버 3번의 김호곤. 1분 후 이번에는 호주의 결정적 실수가 나왔다. 김재한은 상대 수비의 백패스를 가로챘다. 허겁지겁 달려나오는 골키퍼를 바라보며 여유있는 동작으로 빈틈을 노려 오른발 슛을 터뜨렸다. 대한민국의 선취골을 넣었다.

한국은 고재욱의 골로 2-0으로 달아나며 월드컵 출전권을 거의 손에 넣었지만, 호주의 반격에 두 골을 허용, 2-2로 비겼다. 어웨이 골 룰이 없던 시절이라 1주일 뒤 제3국 홍콩에서 플레이오프가 열렸고, 호주가 1-0으로 승리하며월드컵에 나갔다. 이때의 활약을 눈여겨 본 홍콩 세이코 SA가 입단 제의를 했고, 김재한은 홍콩 세미프로팀으로 이적해 두 해 동안 뛰었다.

1978년 월드컵 예선은 김재한의 전성기였다. 국가대표 경기 이틀 전에야 차출이 가능하다는 말에 미련없이 세이코와 계약을 해지하고 국내로 복귀했다. 한국은 1차 예선에서 절대 장자 이스라엘을 차범근, 박상인, 최종덕의 연속골로 3-1로 잡았다. 최종예선은 한국, 이란, 호주, 쿠웨이트, 홍콩 다섯팀의 홈앤드에웨이 풀리그. 77년 6월부터 장장 6개월 동안 이어진 대장정에서 대한민국은 다시 한번 2위로 예선탈락하며 분루를 삼켰다. 승자는 6승2무의 이란. 한국의 성적은 3승4무1패였다. 한국의 1패는 최종예선을 4위로 마감한 호주와의 어웨이 경기 1-2 역전패다. 이란의 2무는 한국과의 0-0, 2-2 무승부다. 12월 홍콩과의 홈경기 5-2 승리가 김재한의 대표팀 은퇴 경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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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중반 대표팀 최장신 김재한(왼쪽)과 최단신 김진국./ 사진제공=이재형 축구수집가
사모님도 유명 인사다. 관중석의 다른 원로급 축구인들이 '아이고, 우리 영순이 언니~'라며 반갑게 인사했다. 1970년 9월 제일은행 입단,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 여자농구 은메달의 주역 조영순이다. 조영순은 재일동포다. 당시 규정은 '재일동포는 입단 3개월 후 출전 가능'이었지만, 일본의 귀화 요청을 뿌리치고 귀국한 점을 높이 사 농구협회는 조영순의 즉각 출전을 허락했다. 소속팀은 제일은행이었다. 조영순이 김재한의 축구 대표팀의 일본 원정 경기를 직접 관전한 것이 인연이 되어 결혼에 골인했다고 한다. 상대적으로 경기가 안 풀린 날이었는데, 조영순의 위로 방문이 즉각 열애로 발전했다는 후문이 있다. 어쩌면 이들 부부는 '신랑 신부 합산 신장(身長) 전국 1위'의 최장신 커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 김재한은
경북 금릉군(현 김천시) 출생으로, 제일모직(1966), 건국대(1967~1970), 제일모직(1971), 주택은행(1972~1975), 홍콩 세이코 SA(1976~1977), 주택은행(1977~1979)에서 선수로 활약했다. 국가대표로는 1972년부터 1978년까지 58경기에 출전해 33골을 넣었다. 1972년 7월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메르데카배가 국가대표 데뷔전이다. 은퇴 후에는 주택은행 감독(1980~1989)을 거쳐 주택은행 지점장·영업부장, 싸카스포츠 부사장·사장,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장원재 선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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